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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해, 오늘도 아름답게
oneday

<노르웨이의 숲>(무라카미 하루키) 7장 중에서

by 가던경 2022. 7. 27.

*
일요일 아침,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미도리의 아버지에 대해 썼다. 같은 수업을 듣는 여자애 아버지를 문병 가서 오이를 먹었어. 그랬더니 그 사람도 먹고 싶다면서 아작아작 씹어 먹었어. 그런데 닷새 후 아침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그가 오이를 씹을 때 내던 아작, 아작, 하는 작은 소리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어. 사람의 죽음이란 아주 사소하고 묘한 추억을 남기는 것 같아, 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에서 너와 레이코 씨와 새장을 생각한다고 썼다. 공작, 비둘기, 앵무새, 칠면조, 그리고 토끼를. 비 내리는 아침에 두 사람이 입었던 후드 달린 노란 비옷이 생각난다고. 따스한 침대에서 너를 생각하면 정말 기분이 좋다고. 마치 내 곁에서 네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깊이 잠든 듯한 느낌이 든다고. 그게 현실이라면 얼마나 멋질까, 그런 상상을 한다고.
가끔 견디기 힘든 외로움에 젖을 때도 있지만, 난 대체로 건강하게 잘 지내. 네가 매일 아침 새를 돌보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나의 태엽을 감아.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 수염을 깎고 아침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와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난 대체로 서른여섯 번 정도 끼륵, 끼륵 태엽을 감아. 자, 오늘도 하루를 잘 살아 보자고 하면서. 스스로는 못 느끼는데 요즘 들어 내가 혼잣말을 자주 한다고들 해. 아마도 태엽을 감으면서 뭐라고 혼자 중얼대는 말일 테지.
너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정말 괴롭지만, 만일 네가 없었더라면 나의 도쿄 생활은 정말 엉망이 되어 버렸을 거야.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누운 채 너를 생각하기에, 자, 이제 태엽을 감고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는 거지. 네가 거기서 열심히 살듯이 나도 여기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오늘은 일요일이라 태엽을 감지 않는 아침이야. 세탁을 마치고 지금은 방에서 편지를 써. 이 편지를 다 써서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 버리면 저녁 때까지 아무 할 일이 없어. 일요일에는 공부도 하지 않아. 평일에 강의를 듣는 잠짬이 도서실에서 꽤 집중해서 공부하니까 일요일에는 아무 할 일이 없는 거야. 일요일 오후는 조용하고 평화롭고, 그리고 고독해.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지. 네가 도쿄에 있었을 즈음 일요일에 둘이서 걷던 길을 하나하나 떠올릴 때도 있어. 네가 입었던 옷도 아주 또렷이 떠올라. 일요일 오후에 난 정말 온갖 것들을 떠올리곤 해.
레이코 씨에게 안부 전해 줘. 밤이 되면 그녀의 기타가 굉장히 그리워져.
나는 편지를 다 쓴 다음 그것을 200미터 정도 떨어진 우체통에 넣고, 가까운 빵집에서 달걀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서 공원 벤치에 앉아 점심 대신 먹었다. 그런 다음 시간이나 죽일 겸 해서 야구를 하는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한층 파랗게 드높아진 하늘에 두 줄기 비행운이 전차 노선처럼 곧장 서쪽으로 내달렸다. 내 앞으로 굴러온 파울 볼을 집어 던져 주자 아이들은 모자를 벗어 들고 고맙습니다, 인사를 했다. 소년 야구단이 대부분 그러하듯 볼 넷과 도루가 많은 게임이었다.
오후가 되어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천장을 바라보며 미도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미도리 아버지가 정말로 나에게 미도리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려 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가 정말로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아마도 나를 다른 누군가로 착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차가운 비가 내리는 금요일 아침에 그는 숨을 거두었고,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은 없어지고 말았다. 아마도 숨을 거둘 때 그의 몸은 더 작게 졸아들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뜨거운 화로에서 한 줌 재로 불타 버렸다. 그가 남긴 것은 저물어 가는 상점 거리에서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서점과 두 딸뿐이다.(적어도 그 가운데 하나는 꽤 성격이 특이한.) 도대체 그의 인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병원 침대에서 의사가 열어젖혀 휘저어 놓은 혼탁한 머리를 끌어안은 채 어떤 생각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을까?
미도리 아버지를 생각하노라니 점점 애절한 기분이 들어, 나는 서둘러 옥상 위 빨래를 거둬들이고 신주쿠로 나가 거리를 걸으며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혼잡한 일요일 거리는 나를 오히려 푸근하게 해 주었다. 나는 통근 열차처럼 붐비는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사서 음악을 크게 틀어 줄 것 같은 재즈 카페에 들어가 오넷 콜먼이니 버드 파월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뜨겁고 짙고 맛없는 커피를 마시며 방금 산 책을 읽었다. 5시 반이 되어 나는 책을 덮고 바깥으로 나와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불현듯 앞으로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몇십 번 몇백 번 반복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이라고 나는 입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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