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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몸의 철학인가?(노양진)

by 가던경 2021. 10. 26.

왜 몸의 철학인가?

 

몸의 복권

몸은 우리 존재의 근거이며, 사유의 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우리와 너무나 친숙하다는 이유 때문에 동서양을 불문하고 오랫동안 사생아처럼 지적담론의 변방을 서성이는 불운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러한 몸의 소외는 철학적 사유를 포함한 모든 추상적 활동은 마음의 산물인 동시에 인간과 다른 동물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 주는 본질적이고 배타적인 능력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러한 편향적 태도는 정신주의라는 고착적 태도로 확립되고 전승되어 왔다. 드물게 이러한 정신주의적 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철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주장은 대부분 위험한 일탈로 치부되었다.

서구 지성사에서 마음의 우선성에 관해 처음으로 체계적 견해를 제시했던 철학자는 플라톤이다. 플라톤에게 몸은 불멸의 영혼을 담는 일회적 그릇에 불과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고양된 세계로의 상승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플라톤은 이상적 존재들인 이데아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주어지지 않으며, 오직 인간의 상위적 능력인 마음에 의해서만 도달 가능하다고 보았다. 몸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시각은 중세 기독교의 신학적 세계관을 벗어난 근세에 들어서도 여전히 지배적인 신화로 유지된다. 그래서 근세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R. Descartes)는 인식의 확실한 출발점으로 나는 생각한다를 택했다.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을 각각 독립적 실체로 규정했으며, 모든 철학적 희망은 오직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정형화되었다. 인간은 순수하게 생각하는 존재로 간주되며, 몸은 또 다시 지적 관심의 변방으로 벗어난다.

서구 지적 전통에서 지배적 주류의 자리를 차지해 왔던 이원론적 시각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니체(F. Nietzsche)󰡔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는 전적으로 일 뿐,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정신주의의 허구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선언했다. 그러나 니체의 목소리는 불온한 반역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20세기에 들어 경험적 탐구의 성과를 중시하는 메를로 퐁티(M. Merleau-Ponty)와 듀이(J. Dewey)의 철학을 통해 몸의 중심성은 훨씬 더 체계적이고 섬세한 방식으로 옹호되었지만 정신주의라는 지배적 물길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경험과학적 탐구의 성장에 힘입은 새로운 철학적 반성들은 몸/마음 이원론이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든 가정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 주기 시작했다. /마음 이원론의 핵심적 난점은 몸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그 둘의 상관관계를 적절히 설명하는 일이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플라톤의 영혼, 데카르트의 송과선도 위대한 철학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궁색한 해결책이며, 이것은 이 문제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보다는 이 물음을 낳은 철학적 구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라일(G. Ryle)󰡔마음의 개념󰡕에서 데카르트적 이원론이 몸과 마음을 대등한 범주로 착각하는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에서 비롯된 허구적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김재권은 수반(supervenience) 이론을 통해 심리적 사건들은 물리적 사건들에 수반해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마음의 독립적 지위를 부정하는 물리주의적 해명의 길을 열었다. 라일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구도 자체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면, 김재권의 수반 이론은 마음의 본성에 관한 대안적 이론의 방향을 바꾸는 데 적극적 계기를 제공했다.

오늘날 몸의 복권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것은 체험주의(experientialism)라는 새로운 철학적 흐름이다. 언어학자인 레이코프(G. Lakoff)와 철학자인 존슨(M. Johnson)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는 체험주의는 인지과학의 경험적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 논의를 철학적 영역으로 확장시켜 가고 있다. 직접적인 학문적 영향 관계는 아니지만 체험주의는 대체로 듀이나 메를로 퐁티와 유사한 철학적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몸의 중심성이라는 체험주의의 논제가 몸의 배타적 우선성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구 지성사를 통해 무시되거나 간과되었던 몸의 복권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몸의 중심성에 대한 체험주의의 옹호는 우선 마음의 배타적 능력을 받아들이는 정신주의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그것은 특정한 몇몇 이론들의 부분적 수정이 아니라 철학적 탐구와 철학적 이론들의 본성에 대한 시각 변화를 요구한다. 이 때문에 레이코프와 존슨은 󰡔몸의 철학󰡕(Philosophy in th Flesh)에서 제2세대 인지과학의 새로운 경험적 발견들과 함께 2000년 동안 지속되었던 사변철학은 끝났으며, 철학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것일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지과학의 다양한 경험적 증거들은 사변을 통해 구성되었던 철학적 이론들이 우리에게 실현 불가능한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것은 다시 새롭게 제시되는 철학적 가설들이 수용 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러한 경험적 증거들과 양립 가능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레이코프와 존즌은 경험적으로 책임 있는 철학’(empirically responsible philosophy)을 제안한다.

 

2세대 인지과학과 마음의 발견

경험 구조에 대한 체험주의적 해명이 주목하는 것은 마음의 본성에 관한 학제적 탐구인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경험적 증거들이다.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된 인지과학은 언어학, 심리학, 철학, 인류학, 신경과학, 컴퓨터과학 분야가 공동으로 마음의 본성을 밝히려는 학제적 탐구의 한 유형이다. 인지과학 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마음의 핵심적 소재가 우리 몸의 일부인 두뇌라는 믿음을 공유하는데, 초기 인지과학을 이끌어 갔던 것은 주로 인지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 가설들이었다. 이들은 마음이 일종의 컴퓨터처럼 법칙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마음에 관한 법칙적 탐구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인지주의는 마음을 독립적 실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초기 인지과학을 이끌었던 인공지능 이론, 정보처리 심리학, 형식논리, 생산언어학 등이 전형적인 인지주의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지과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인지주의에 반하는 중요한 사실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발견들은 우리의 전반적 사고와 경험이 신체적 요소에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정에서 상상적 기제들, 은유’(metaphor), ‘환유’(metonymy), ‘심적 영상’(mental imagery), ‘원형’(prototype) 등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마음의 작용이 법칙적 알고리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인지과학적 흐름을 2세대 인지과학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그 핵심적 발전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집약한다.

 

신체화된 마음

마음의 작용은 몸의 활동의 특수한 형태이거나 그 산물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가정했던 순수한 마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은 본성적으로 신체화되어(embodied) 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모든 추상적 작용은 몸의 활동, 특히 두뇌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항상 신체적 요소들에 의해 강하게 제약된다. 마음의 활동을 대변하는 서구적 이성 개념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미 또한 모두 신체화되어 있다. 따라서 순수한 마음, 순수한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 또는 정신적이라고 불리는 모든 현상은 몸을 통한 물리적 경험이 확장되는 방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몸과 마음의 이원론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의미한다. 즉 신체적 요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마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체험주의의 이러한 해명은 창발’(emergence)이라는 개념을 통해 몸과 마음을 설명하려고 했던 듀이의 견해와 매우 유사하다. 즉 마음은 몸의 활동을 통해 생겨나는 그러나 몸의 요소들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양상이다. 마음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의식적 사고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의식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사고는 그 작용 과정이 우리의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의식적이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두뇌 작용을 의식하지 못한다. 내가 말하는 것이 무작위적인 발화가 아니라면 그것은 단어와 단어, 문장가 문장, 그리고 문단과 문단이라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한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나의 두뇌는 일정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겠지만 나는 그 작동 방식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나의 무감각이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두뇌의 본성적 작용 방식 때문이다. 일상적 경험의 틀이 되는 개념체계들 또한 대부분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용한다.

이러한 두뇌 구조를 가진 우리에게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코기토’, 후설(E. Husserl)이 제시하는 사태 자체’, 칸트(I. Kant)가 제시하는 순수이성은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연속적이고 중층적으로 구성해 온 개념들의 일부 또는 전부를 철학적이든 일상적이든 어떤 필요에 따라 임의적으로 제거하거나 철회할 수 있는 인지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개념들의 은유화

전통적으로 은유’(metaphor)는 단순히 언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적 기술의 일종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험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은유는 단순히 언어적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과와 행위를 지배하는 매우 광범위한 인지 작용이다. 외부 세계의 대상들을 직접 가리키는 제한된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의 인지 작용은 대부분 은유적으로 확장된다.

체험주의에 따르면 모든 추상적 개념들은 우리 경험에 이미 주어진 것들이 은유적으로 투사됨으로써 새롭게 형성된다. 예를 들면, ‘사랑’, ‘자유등과 같은 개념들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방식을 보라. 구체적 경험들을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은유적으로 투사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추상적 개념이 만들어진다. 이때 은유화는 A관점에서’(in terms of) B를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A는 이미 주어진 경험이며, B는 새롭게 형성되는 추상적 개념이다. 그래서 투사는 사실상 기호화와 동일한 작용이다. 이러한 은유 작용은 특수한 개념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사고와 행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모든 철학적 개념들은 은유적 사고의 산물들이며, 철학 이론들은 정교한 은유들의 체계다. 즉 고도의 추상적 사유의 산물인 철학적 이론들과 개념들 또한 신체적 근거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토대로 은유적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몸의 철학󰡕은 이러한 시각을 따라 전통적인 서구의 철학 이론들을 매우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다. 모든 철학 이론들이 모두 은유들의 체계라면 이제 더욱 중요하게 요구되는 지적 작업은 어떤 은유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더 나은가를 식별하고, 또한 그러한 시각에 따라 새로운 은유들을 창조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이론들이 각각 이 세계를 정확하게 해명하는 유일한 이론이라고 자임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의 복권과 다원주의적 선택

오늘날 인지과학의 탐구 성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적 이론도 아니며, 또한 우리가 마음의 본성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것에 비한다면 양적으로다 질적으로나 여전히 불충분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양한 경험과학들 사이의 교차적 검증을 거친 수렴적 증거들은 다양한 이론적 가설들에 대해 강력한 반증으로 작용한다. 즉 어떤 이론적 가설이 적절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 경험적 증거들과 양립 가능한 것이 되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은 것들은 쉽사리 반박된다는 것이다. 체험주의의 분석에 따르면 과거의 사변적 이론들은 대부분 이 경험적 증거들에 부합하지 않으며, 이것은 사변적 이론들이 특정한 이론적 편항과 열망들에 의해 이끌려 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서 몸의 철학은 아제 나는 생각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 대신에 나에게는 몸이 있다라는 명제를 새로운 지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몸의 철학이 제안하는 것들은 고전적인 철학개론을 통해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폭넓고 급진적인 것일 수 있다. 아직도 정신주의의 신화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사변철학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폐쇄된 시간과 공간 안에 가두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징표인 철학적 사유를 가로막는 일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의 철학은 고양된 사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그릇된 유토피아적 열망들의 억압적 위험성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마음의 철학은 아직도 이성주의’, ‘도덕주의’, 그리고 금욕주의와 같은 위험한 열망들을 등뒤에 숨기고 있다. 몸의 철학은 이 모든 것들이 극복되어야 할 철학적 편향의 산물이라고 알려 준다.

몸의 철학은 절대적인 것이 현재와 같은 몸을 가진 우리 자신에게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로티(R. Rorty)의 말처럼 우리는 만약 절대적 진리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언제 그것에 도달했는지를 스스로 식별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몸의 철학이 단일한 진리를 거부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된다’(Anything goes)라는 유형의 허무주의적 상대주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몸은 객관주의자가 원하는 정도의 객관성은 아니라 하더라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공적 지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으로서의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의 공공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바탕에 바로 몸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수의 진리들을 인정하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제약된 다원주의가 왜 필요하며, 또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 준다. 이러한 몸의 철학은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는 소수의 현자 철학을 버리고,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더 나은 것에 관해 이야기할 것을 권고한다.

 

노양진 교수(전남대 철학과), 2004.5.18.화.<전대신문> 4면(학술)에 실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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