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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해, 오늘도 아름답게
drama

김탄의 순정

by 가던경 2015. 9. 14.

 

 

밤을 샜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다. 오전 여섯시 이십분에 잠들어 오전 여덟시에 일어났는데도, 나는 지금 머릿속이 또렷이 복잡하다.

 

밤새 무얼 했냐면, 드라마 <상속자들>을 다시 봤다. 김은숙 작가는 정말... 나쁘다. 그때도 지금도, 이렇게 나를 괴롭게 만드니 나쁘다. 도대체 왜 그런 판타지를 그렇게나 잘써서 사람을 이렇게 피말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드라마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청자를 들었다놨다를 골백번도 더 했던 능력에 대단한 작가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난 세가지 때문에 심정이 복잡했다. 첫째, 왜 김탄은 그렇게 순정적인가. 둘째, 그렇게 순정적이고도 순정적인 남자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걸까. 셋째, 순정은 항상 고통스러운 상황 혹은 환경을 동반해야만 증명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세가지 의문으로 나는 밤새 왔다리 갔다리.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럴때마다 노희경이 쓴 그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십대 소녀도 아닌 이십대, 삼십대의 드라마 주인공들이 늘 우연히 만난 지난날의 첫사랑 때문에 목을 매는 한국드라마에 난 정말 신물이 난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순정을 강요하는 한국드라마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순정적이지 못했던 내가 싫었다. 왜, 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더 상대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을까? 내가 이렇게 달려오면 되는데, 뛰어오는 저 남자를 그냥 믿으면 되는데, 무엇이 두려웠을까?"

 

한국드라마의 문제는 순정에의 강요라고 말하는 노희경 작가의 말이 자주 떠올랐다. 맞다. 어떻게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그렇게 매번 순정적일 수 있는지. 더군다나, <상속자들>의 김탄은 그 순정의 정점을 찍는 인물이다. 물론,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사랑에 목숨도 걸 것만 같은 뜨거운 18살. 18살의 소년은 한 소녀를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져버렸다. 그는 상대방보다 자신이 소녀를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하여 기분 나빠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그 소녀가 좋고, 보고싶고, 그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계속 궁금했던 질문 중 하나는 그는 그녀의 무엇에 반했는지이다. 무엇이 그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하게 만든 것일까. 나는 김탄의 그 순정에 매우 놀랐으며 매료됐다. 난 정확히 그에게 반했기 때문에, 화가 났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순정적인 사랑을, 애타는 사랑을 할 수 있을지 항상 두려워하고 의심했으니까.

 

이 시점에, 다시 노희경의 말로 돌아간다. "단 한 번도 순정적이지 못했던 내가 싫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 드라마에서는 모두 하나같이 남자가 그렇게나 열성적으로, 피끓는 청춘의 힘으로, 치열하게, 한 여자를 갖기 위해 온 몸을 내던지는지. 나는 그런 장면에 뭐가 그렇게도 복잡해지는지. 또 순정을 더 극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은 항상 고통스런 상황, 이별 그 뒷이야기로여야 하는지.

 

 

 

 

김탄은 차은상이 떠나고 망가질대로 망가진다. 그러다 차은상이 작은 핑계를 찾아 김탄 옆으로 돌아온다. 차은상은 김탄의 망가진 얼굴을 보고 말한다.

 

차은상: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바보야."

김탄: "네가 떠났지."

 

김탄은 차은상에게 고백한다.

 

"좋아해. 보고 싶었어. 죽을 것 같더라. 웃지 말아야지. 잘 살지 말아야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져야지. 아무도 사랑하지 말아야지. 운명이 어쩌고 하면 비웃어 줘야지. 그랬어. 그러니까, 다시는 나 버리지마. 차은상."

 

김탄이라는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의 순정에 져버렸다. 그 순정에 무너지지 않을 상대가 있을까. LA에서 마주친 한 여자.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에 그 여자가 없진 않았고, 그 여자와 같은 집에 살게 되서 좋았고. 열심히 좋아한다고, 네가 좋아졌다고 말하는 남자. 그녀를 떠나보내고 가슴을 치며 미치도록 우는 남자. 자신의 시간과 삶을 스스로 망치려는 남자.

 

 

 

 

나는 2013년 이 드라마를 볼 때, 드라마 속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아니 현실감이 없다는 것을 합리화 하기 위해 이틀밤을 새워 삼성 가계도를 작성했다. 친인척까지를 포함한 가계도였다. 누구와 결혼했고, 결혼 과정은 어땠으며, 그 끝은 어땠는지. 그리고 결론지었다. 절대,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여름밤의 꿈 같은 이야기. 그런 이야기는 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안겨줄까. 이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감정일까. 나만 유별스러운건가. 아니면, 감정이입이 너무 심하게 된 건가.(둘 다 유별난 건 마찬가지지만)

 

이민호의 연기는 높게 살 만 했다. 그의 연기를 보면서, 대사를 정말 잘 살린다고 느꼈다. 아무리 좋은 대사여도 그것을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 느낌은 천지차이일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 뒤로 그의 인터뷰 기사를 지나가는 잡지에서 보게 되도 꼼꼼히 읽었다. 그의 연기 세계와 가치관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연기할 때가 가장 즐겁다고 하니, 그의 건투를 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구구절절 김탄의 순정에 대해 이렇게 오래도록 생각하고 이야기 하는 것은 그가 정말... 연기를 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탄이라는 남자가 정말 탐나고 멋있는 사람일 수 있게, 그는 연기를 잘했다. 특히 순수함이 묻어나오는 강렬한 눈빛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 관련 사진은 이 글과 전혀 무관한 사진들로 삽입했다. 신형철 교수 글의 부분 캡쳐 사진과 영산강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나는. 김탄이 보여준 순정은 본 적도 없고 경험해본 적도 없어,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지만, 부정하는 크기만큼 나는 순정을 갈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러한 순정적인 사랑에 목매는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들킨 기분이다. 조만간 <상속자들>을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사랑해. 오늘도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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